제목

letter 2023 may

작성자 리튼온워터

작성일 2023-06-02 18:04:32

내용

'봄과 여름 사이, 햇살만큼 길게 드리운 그림자'

친애하는 리튼온워터의 친구들에게

리튼온워터의 첫번째 편지로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리튼온워터를 만들고 가꿔가고 있는 박창용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 편지는 두서 없는 제 개인적인 감상과 생각을 담은 글임을 밝힙니다.

어느덧 5월도 다 지나갔네요. 더위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르고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무엇을 이야기할지, 어떤 어투가 좋을지 며칠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했는데 한동안 관성이나 습관에 의해 브랜드를 바라보던 까닭인지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올해 여름이면 벌써 리튼온워터라는 브랜드를 선보인지 3년째가 됩니다. 객관적인 지표에서 봤을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너무 많고 물이 새는 틈이 점점 많아져 손, 발을 다 써도 이제는 막을 수가 없어졌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그 틈을 조금씩 메꿔보려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리튼온워터는 하나의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또한 켜켜이 쌓인 영감과 이야기들이기도 하니까요.

리튼온워터라는 브랜드를 설명할 때 

성분, 향기, 디자인... 이런 것들로 문장을 채우는 것이 객관적이고 일반적이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았으니까요.

인스타그램 문구를 쓰거나 광고 또는 홍보용 글을 쓸 때마다 사실 리튼온워터의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못하는건 아닌지…  브랜드를 더 알릴 수 있는 수단으로써, 좀 더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창구로써의 글.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리튼온워터 안에는

저와 제 반려견이 있고, 영화 <패터슨>의 빈 노트가 있고, 라벨의 <물의 유희>가 있고... 그리고 손을 씻는 심은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의...) 까지 있으니까요.

궁핍한 브랜드로써 리튼온워터는 유수의 뷰티 브랜드에서 하는 일반적인 방법(유명한 친구들, 값비싼 협찬이나 또는 광고)으로 틈을 메꿀 수 없습니다. (이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네요!) 물론 이 글을 쓴다고 해서 리튼온워터의 벽과 천장과 바닥에 있는 틈이 메꿔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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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비가 내리던 어느날, 오랜만에 서점에서 꽤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친구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 날도 머릿속은 늘 그렇듯 온통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나? 라는 의구심… 숫자가 추앙받는 시대에 ‘마음을 두드리는 브랜드’라니! 따위의 고민들.

그러던 중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를 마주치고, 제목과 표지를 보고, 표지 사진 작품의 작가에 대해 읽어보고… 

곧장 책을 구입해 주말동안 눈깜짝할 사이 읽었습니다.

책의 제목이 ‘태도가 작품이 될 때’라니 태도와 기분을 온통 갈아 넣어 제품을 만든 사람이 꽤나 궁금할만한 제목 아닌가요?

표지의 작품은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라는 작가의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였습니다. 작가는 이 구슬프게 울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내거나 3분짜리 비디오로 만들었다고 해요. 왜 슬픈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또다른 대표작은 <추락>연작이라고 합니다. 어디선가 굴러 떨어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강에 고꾸라지거나 바람에 쓰러지거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등의 상황을 재현합니다. 그리고 유작은 <기적을 찾아서>(1975). 초소형 보트를 타고 혼자 대서양을 횡단하는 퍼포먼스였는데 도중에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열달이 넘어서 텅 빈 배만 어딘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요. 어떤 이들은 이 실종 또한 작가가 작품의 완성을 위해 연출한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고 하는데요. 책에선 이 작가와 작품들에 관해 자유의지, 권위로부터의 탈출 등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전 어쩔 수 없이,

이 작가가 망망대해에서 느꼈을 공포를 상상하고 더 큰 공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자유의지일수도 있지만 어쩔 도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어디선가 굴러 떨어지고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상황들…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지경.

나약한 존재는 결국 쓰러지고 부서진다는 잔인한 원칙을 보여주는 듯한 아더르의 개념미술은 또다른 설치 작품인 <Light Vulnerable Objects…>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재현한 전시를 아래 유튜브링크에서 볼 수 있고 다른 비디오 작품들 역시 유튜브에서 검색이 가능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작가의 선택이니 (어쩌면 실종조차도!) 공포와 슬픔의 시선으로만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틀린 것일 수도 있어요. 책에서 해석한 문장을 옮겨보자면...

‘아더르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좌절과 실패가 아니라, 애써 떨어지겠다는 자신의 의지와 태도가 아니었을까.’

홀로 브랜드를 이끌어 가다보니, 그때 그때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 때로는 제품 이름에, 제품의 기획에 어쩔 수 없이 녹아드는 것을 봅니다. 애초 리튼온워터라는 브랜드는 실패와 좌절에 대한 체념과 위로의 감정에서 출발했으니까요. 이게 과연 맞을까요? 아마도 저명한 사업가들은 그건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 없이 이 사소한 모든 것들, 선택과 실수와 사고와 우연과 결정과 감정 그리고 태도가 리튼온워터를 조금씩 완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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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아하는 색이 초록색은 아니지만,

알폰소 쿠아론 영화의 초록색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의 초기작, <소공녀>, <위대한 유산>에선 초록색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후 그가 감독한 여러 작품들 예컨데, <해리포터:아즈카반의 죄수> 속 풍경도 초록색 스펙트럼을 벗어나지 않아요)

특히 개봉관에서 보았던(!) <위대한 유산>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집밖의 세상을 구체적으로 갈망하기 시작한 18살 소년에게 이 영화 특유의 스타일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위대한 명작은 아니에요.

무엇보다 각본이 90년대 헐리웃 영화답게 허술하고 밍숭맹숭합니다. 지나치게 캐스팅에 기대서인지 아니면 스타일이 너무 튀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안일한 뮤직비디오 같기도 해요.

그래도 전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합니다.

귀네스 팰트로가 입은 연두색 도나 카란 드레스부터, 녹색 로고의 쿨 담배까지… 다채로운 초록색으로 빼곡히 들어찬 뉴욕의 아름답고도 살벌한 풍경은 정말 매혹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에 의해 세련되게 조율된 녹색 빛과 춤추는 듯 유려한 카메라 워크는 더할 나위가 없구요.

헌데 2016년,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에 참석한 쿠아론과 루베즈키는 이 영화 <위대한 유산>이 자신들의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언급합니다. 쿠아론과 루베즈키는 특히 각본의 문제 외에도 본인들이 초록색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점 또한 실수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녹색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좋았던 저로썬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어요. 창작자가 부정한 작품. 그의 영화를 두루두루 좋아하지만 그래도 그의 초기작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팬으로써 마치 18살의 풋풋한 기억마저 외면 당한 것 같은 기분.

물론 쿠아론과 루베즈키가 <위대한 유산>을 실패로 부정했어도, 저에겐 18살의 기억이 더해져 또다른 의미를 지닌 영화이니 꼭 실망할 필요는 없겠죠.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창작자에게 스스로 자신의 실패작을 고백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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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색이 초록색은 아니지만,

초록이 느껴지는 향을 좋아해서 제가 만든 브랜드의 기본적인 향조는 ‘그린’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놀로그 바디 제품은 식물과 꽃이 만발한 녹색의 정원을 떠올리며 향을 만들었어요. 알폰소 쿠아론처럼 초록에 집요할 정도로 집착한 것은 아니지만 초록향을 구현하기 위해 불필요한 수고를 했는지도 모르고… 쿠아론에게 <위대한 유산>이 있다면 저에겐 이 제품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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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음악

리튼온워터의 이름으로

5월의 믹스테입을 만들었습니다.

봄과 여름 사이, 길어진 햇살과 그 햇살만큼

드리워진 서늘한 그림자를 떠올리며 선곡했어요.

5월,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낮엔 시원한 음료를 찾게되고 밤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 활짝 핀 장미가 있는 한켠엔 어느새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도 느껴지는 때인것 같아요.

5월의 외출, 설렘을 닮은 것 같은 비치보이스의 자못 명랑한 곡에서 시작해 이국적인 미스테리, 쓸쓸함,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오묘한 스무개 남짓의 곡들이 있습니다.

기대와 불안을 모두 끌어안고 플레이리스트를 만끽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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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인사

리튼온워터는 5월 25일부터 6월 한달동안 브랜드의 한 단락을 마무리하는 몇몇 작은 행사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전에 없던 카테고리의 제품을 선보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소식은 종종 짧막한 뉴스레터로도 전해드리겠습니다.

첫번째 글이다보니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다음 편지는 6월에, 글 길이는 조금 줄여서, 리튼온워터의 시작을 함께한 영감의 원천들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그때까지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재미없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튼온워터 박창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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